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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조직 근로자보다 사회적 약자를 대표해야

윤희숙 2018/06/25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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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조직 근로자보다 사회적 약자를 대표해야

윤희숙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고성장 시대가 저물면서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근로자가 더 이상 다 같은 근로자가 아니게 되었다는 점이다. 서구 선진국과 우리나라 모두 일자리 불안정과 저임금에 허덕이는 저숙련 근로자 비율이 높아지면서 이들과 안정적 일자리를 가진 근로자의 차이가 뚜렷해졌다.

 

이는 경제적 변화의 일부이기도 하지만 더 깊은 차원의 사회 구조적 메가 트렌드이기도 하다. 1980년대 들어 주요 제조업의 경쟁력을 상실한 서구 선진국, 임금 상승과 주변 국가의 산업화로 경공업 경쟁력을 급속히 잃은 우리나라 모두 1990년대 이후에는 저임금 서비스 부문이 빠르게 확대되는 대신 괜찮은 일자리가 줄어들었다. 또한 여성 교육 수준이 높아지면서 맞벌이가 표준으로 자리 잡았고 기대 수명 연장으로 은퇴 노인 인구의 비중이 커졌다.

 

그 결과 요즘 가장 어려운 가구는 돈 버는 사람이 없는 가구다. 그보다 조금 낫지만 여전히 국가의 도움이 필요한 가구는 저임금 근로자 한 명의 벌이로 자녀를 키우는 가구이다. 반면, 어지간한 일자리를 가진 맞벌이나 고숙련 근로자 가구는 비록 각자는 살기 팍팍하다고 느낄지라도 정부의 약자(弱者) 지원 대상은 아니다.

 

그러니 재분배도 훨씬 복잡해졌다. 대략 모든 가구에서 한 명씩 일하던 시절에는 저임금을 끌어올리면 곧 빈부 격차를 줄일 수 있었다. 이제는 저숙련 근로자들의 입지(立地)가 약하다 보니, 이들의 임금을 인위적으로 올릴 경우, 오히려 이들이 일자리를 잃을 위험이 커졌다. 별 고급 기술도 아닌 경비 카메라는 경비원 일자리를 쉽게 대체한다. 빈곤 가구를 배려해 최저임금을 많이 올린다 해도, 실직(失職) 걱정을 안 해도 되거나 일자리를 잃더라도 다른 가구원 소득에 기댈 수 있는 사람들에게 혜택이 가는 것이다.

 

이는 큰 폭의 사고 전환을 요구한다. 취업자가 없거나 모자라는 것이 빈곤의 가장 큰 원인이니 그나마 있는 일자리를 줄이는 정책은 결사적으로 피해야 한다. 또 같은 저임금 근로자라도 가구원 수와 구성에 따라 상황이 다르니 어려운 경우를 파악해 적극 돕되 일자리를 위협하지 않는 방식을 써야 한다.

 

더 근본적 문제는 근로자 대표를 자처하는 그룹이 더 이상 약자의 대표도, 근로자 전체의 대표도 아니라는 점이다. 지금의 약자는 취업하고 싶어도 못 하거나 일자리를 잃을 위험이 높은 사람이다. 조직 근로자는 자신들의 이해를 위해 싸울 권리를 보장받아야 하지만, 자신들이 대표하지 않는 이들을 다치게 할 권리는 없다. 최저임금을 올려도 실직 걱정이 없는 사람들에게 최저임금을 결정할 권한을 줘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약자의 대표는 다른 누구도 아닌 정부다. 사회적 약자와 기득권 조직 근로자 간의 이해 상충 문제를 직시하고 약자 편에 서는 것은, 전통적으로 조직 근로자의 지지에 기대왔던 각국의 중도 좌파가 책임 정당으로 인정받기 위한 최대 과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이러한 고민에서 한참 비켜나 있다. 며칠 전 OECD는 우리나라의 최저임금 인상 폭을 'OECD 국가에서 유례 없는 수준'이라 평했다. 최저임금 덕에 근로자 90%의 소득이 늘었다며 자화자찬한 청와대는 최저임금 제도의 주 대상이 열악한 10%여야 한다는 것 자체를 인지못한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경제수석은 90% 발언을 해명하면서 취업자를 잃은 가구를 뺀 자료만 사용했다. 보도에 따르면 청와대는 무취업자 빈곤 가구는 '일자리가 아니라 구휼' 대상이라는 논지를 내세웠다. 일자리가 구휼(救恤)이 된 지 오래인데도 우리 정부는 아직 지난 수십 년간의 구조 변화와 전 세계적 정책 흐름을 읽지 못하는 듯하다.

 

제도 틀 자체도 시대적 과제와 동떨어져 있다. 내년도 최저임금 결정 시한은 겨우 20일 남짓 남았지만 최저임금위원회는 파행 중이다. 산입 범위 조정으로 최저임금 인상 혜택이 줄어드는 데에 양 노총이 반발하며 불참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저임금이 정해지지 않으면 내년에 취업할 근로자들은 임금 하한에 대한 아무런 기준선을 갖지 못하게 된다.

 

자신보다 못한 이의 처지를 담보 삼아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비난하는 것보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럴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제도 틀을 시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의 해결은 약자를 보호할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점을 정부가 인식하는 데서만 시작된다. 부디 우리 정부가 예전과 달라진 집단 간 이해 상충 문제를 직시하고 정부 책임이 더 막중해졌다는 점을 깨닫기 바란다.


문의: KDI 홍보팀 김은총 044-550-4034, capkec@kdi.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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