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DI 원장, '더플랫폼' 세미나 기조연설
『오늘날 우리나라의 자유 시장경제』(연설문 전문)
오늘 더 플랫폼 특별 세미나의 기조연설을 맞게 되어 한편으론 대단한 영광입니다만, 다른 한편으론 매우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나라 사회과학계 원로분들이 가득한 자리에서 ‘자유 시장경제’라는 거대 담론을 전개하는 것은 마치 공자님 앞에서 문자 쓰는 것 같다는 느낌입니다. 그저 제가 이해하고 있는 범위 내에서, 그리고 지난 30년간 국책 연구소에서 겪었던 경험을 토대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1. 자유 시장경제의 성과
제 머릿속에 있는 시장경제의 핵심은 선택의 자유입니다. 사회 구성원 개개인이 본인의 행복을 증진하기 위해 생산 및 구매에 대해 결정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을 넓혀 주는 것이 궁극적으로 사회 전반의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자신의 이해관계를 좇아 행동하는 것을 천박한 이기심으로 폄훼하고, ‘사회정의’라는, 듣기에는 매우 숭고하지만 지극히 추상적인 대의명분을 앞세워, 통제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 본능에 가까운 개인의 행복 추구 욕구를 제어하는 것을 전제로 구성된 사회 시스템은, 그 자체에 잉태된 내부 모순 때문에, 희망했던 결과의 성취 가능성도, 시스템의 지속가능성도 담보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개개인의 욕구를 받아들이고, 그들이 자유롭게 선택한 결과로 나타나는 수요와 공급, 그리고 그 균형을 잡아주는 시장가격을 존중하는 것이 건강한 경제발전을 추구함에 있어 꽤 괜찮은 사회 시스템이라는 점은 역사적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입증되어 온 사실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많은 분이 1990년대 초에 발생한 소련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를 기억하고 계실 것이며, 보다 최근에는 에세모글루 교수의 “Why nations fail”에 등장하는 노갈레스 시를 떠올리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보다 훨씬 더 생생한 역사 현장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입니다. 같은 나라에서 수백 년의 역사와 언어를 공유하며 비슷하게 가난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던 남·북이, 전혀 상반된 경제체제를 도입한 지 70~80년 만에 30배 이상 소득 격차가 벌어진 것보다 더 극적인 사례를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개인의 행복을 객관적인 수치로 측정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적어도 남한과 북한 어느 체제에서 살고 싶은가에 대한 대다수 국민의 대답은 불문가지일 것입니다. 최소한 저 자신은, 제 인생에 가장 큰 행운이 제가 남쪽에서 태어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수요와 공급, 그리고 그 균형을 잡아주는
시장가격을 존중하는 것이 건강한 경제발전을
추구함에 있어 꽤 괜찮은 사회 시스템이라는 점은
역사적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입증되어 온 사실"
2. 시장실패와 정부실패
그렇게 자유 시장경제 체제의 우월성은 역사적으로 입증되어왔지만, 이 또한 결코 완벽한 체제가 아니라는 점도 주지의 사실입니다. 이미 Adam Smith가 국방·치안과 같은 공공재 문제를 명시적으로 인식한 이후 수백 년간 많은 경제학자들은, 자유 시장경제가 이른바 ‘한정된 자원의 효율적 배분’이라는 체제의 최대 장점을 달성하는 데에도 실패하는 경우가 있음을 입증해 왔습니다. 특정 경제주체의 행위가 여타 경제주체에게 긍정적·부정적 효과를 미치는 외부효과, 독과점으로 대변되는 불완전 경쟁, 거래 당사자 간의 정보 비대칭성, 죄수의 딜레마로 잘 알려진 coordination failure 문제 등이 대표적인 시장실패에 해당합니다. 자유 시장경제 체제를 추구하는 대다수 나라에서도 이와 같은 시장실패를 교정하기 위해 정부가 많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국방·치안 서비스는 정부가 직접 제공하고 있으며, 긍정적 외부효과를 진작하기 위한 교육 및 연구 지원, 부정적 외부효과를 억제하기 위한 환경 규제, 상품시장에서의 반독점 규제, 금융 및 서비스 시장에서의 정보 제공 의무화, 부동산 시장에서의 이해갈등 조정 등 자유 시장경제 체제에서도 정부의 역할은 막중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유의해야 할 논점은, 자유 시장경제 체제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 정부의 자의적 개입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역사는 오히려 정부실패의 부작용이 시장실패의 부작용을 압도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 고전적 실례로, 프랑스 혁명 직후 민심을 달래기 위해 단행된 로베스피에르의 강압적인 우유 가격 반값 인하 정책이 널리 회자됩니다. 이 정책으로 우윳값이 사룟값에도 미치지 못하게 되자 낙농업자들은 젖소 사육을 포기하고 도축하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 우유 공급이 감소하고 가격이 급등하였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시장 원리의 복원 대신 사룟값 강제 인하로 해결하려던 노력은, 다시 사료업자의 공급 위축을 초래하여 사룟값이 급등한 결과 우윳값은 10배까지 폭등하는 참혹한 결과를 초래했다고 합니다.
이 정도로 무모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비슷한 맥락의 시장개입 유혹은 언제 어디에서나 존재합니다. 스티븐 로즈의 “경제학자가 세상을 구할 수 있다면”(고영태 옮김/한순구 감수)에 등장하는 2008년 미국의 우윳값 급등과 관련된 일화는, 혁명 직후의 프랑스와 놀랍도록 유사한 사례가 오늘날 선진국에서도 발생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안 그래도 글로벌 금융위기로 살림이 팍팍한데 우윳값까지 올라 분통을 터뜨리는 서민들을 달래고 싶었던 정치인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낙농업자에게 우윳값 상승의 원인을 물어보니, 젖소들이 편히 누워 잘 수 있도록 바닥에 깔아 주는 톱밥의 가격이 1~2년 사이에 4배 가량이나 오른 게 주 원인이라고 하였고, 그래서 이번에는 톱밥 가격이 오른 이유를 알아보니 경기 침체로 신규 주택 건설이 급감하면서 톱밥 공급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물량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서민들의 우윳값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가용한 톱밥을 낙농업자들에게 우선적으로 배분하고 싶은 생각이 들 법도 합니다. 그러나 톱밥은 통나무나 합판보다 더 저렴한 파티클 보드의 중요한 원재료로서, 낙농업자에 대한 톱밥 우선 배정은 필연적으로 주택 건설 원가를 인상시켜 서민의 주거 부담을 늘리는 요인이 될 뿐 아니라, 그렇게 주택 가격이 올라 건설이 위축되면 이는 다시 톱밥 공급을 축소시키는 악순환을 형성합니다. 우윳값을 안정시키려는 정책이 결국 우윳값을 안정시키지는 못하고 서민의 주거부담만 늘리게 되는 셈입니다.
물론 톱밥 사례는 상대적으로 사소한 문제로 치부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수많은 경제주체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시장경제에 정부가 자의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으며, 실제 역사에서 찾을 수 있는 훨씬 방대한 규모의 정부개입 폐해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임대료나 주택거래 통제가 수많은 도시들의 발전을 어떻게 저해했는지, 농산물 가격지지 정책이 농업생산성을 얼마나 저해하고 국가재정을 얼마나 낭비했는지, 특정 집단의 기득권 보호를 위해 진입을 규제하는 정책이 얼마나 혁신을 저해했는지, 국가의 예산제약을 고려하지 않고 시행된 인기영합적 복지정책이 어떤 파국적 결과를 잉태했는지 등등 정책실패 사례들은 차고 넘칩니다.
"자유 시장경제 체제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 정부의 자의적 개입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역사는 오히려 정부실패의 부작용이 시장실패의 부작용을 압도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3. 시장 시스템에 대한 ‘무죄 추정의 원칙’
그렇다면 자유 시장경제 체제 또한 한계가 있음이 명백한 상황에서, 어느 정도의 정부 개입이 적절한 것일까요? 이 질문은 경제학계의 끝없는 논쟁 이슈입니다만, 제가 마음에 담고 있는 개인적 견해는 이렇습니다. 자유 시장경제 체제를 존중한다는 것은, 시장 메커니즘에 ‘무죄 추정의 원칙’을 적용하는 것이라고요. 즉, 정부 개입을 주장하는 측에 시장실패의 입증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거론한 바와 같이, 이론적·경험적으로 엄밀한 논의를 통해 시장실패가 입증된 경우에 대해서는, 그에 대한 정부 정책의 목적과 방향성도 자유 시장경제 체제라는 기본 질서의 틀 내에서 명확히 설정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범죄가 입증된 사람들에 대해 공권력이 행사되어야 한다는 것이, 대다수 선량한 시민의 자유를 제약해야 함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시장실패가 입증되지 않은 대부분의 경우에는, 수많은 개인의 자발적 선택이 어우러진 시장 시스템의 결과를 존중하고 수용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시장 시스템의 결과에 대해 소수의 정책 결정권자들이 섣불리 선·악을 규정하고, 이를 임의로 재단하고자 하는 발상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논의는 “무엇 무엇은 할 수 있다”라는 식으로 구성된 우리나라의 positive system 규제체제를 “무엇 무엇은 할 수 없다”라고 표현하는 negative system으로 바꿔야 한다는 논의와 맥을 같이 합니다. 정부가 허용한 영역에서만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금지된 영역 이외에서는 원칙적으로 자유로운 경제활동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가 수십 년째 지속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몇몇 정부가 규제완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10~20년간 우리나라의 규제체제가 획기적으로 변화했다는 증거는 찾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국회를 중심으로 새로운 규제가 양산되는 상황을 종종 목도합니다. 타다금지법 등 레거시 산업의 보호를 위해 혁신기업의 진입을 금지하는 규제, 정규직 노동자의 기득권을 보다 공고히 하는 방향의 노동시장 규제 등 그와 같은 실례는 수없이 많으며, 어떤 객관적 척도를 적용해도 우리나라가 여타 선진국들에 비해 여전히 규제가 많은 나라임은 틀림없습니다.
"수많은 개인의 자발적 선택이 어우러진 시장 시스템의 결과를 존중하고 수용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시장 시스템의 결과에 대해 소수의 정책 결정권자들이 섣불리 선·악을 규정하고, 이를 임의로 재단하고자 하는 발상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4. 정부에 대한 과잉 기대
왜 우리 사회는 이처럼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제약하고자 할까요? 혹자는 규제 권한을 행사하는 공무원 집단의 기득권 보호 때문이라고 합니다. 일견 수긍이 가기도 합니다만, 저는 더 큰 원인이 일반 국민의 의식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사건 사고 소식을 전하는 뉴스는 항상 그 마지막에 “정부는 도대체 무엇을 했는지” 묻습니다. 이상 기후로 급등한 신선식품 가격의 정부 책임론을 지켜보면서, 흉년이 들면 왕을 처형했었다는 고대문명이 연상되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의 모든 불행을 막을 책임이 정부에 있다는 듯합니다. 어차피 이런 분위기를 등에 업고 조여 오는 사회적 책임 압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권한 확대보다 책임 회피에 훨씬 더 마음이 가 있는 공무원일지라도 책임에 상응하는 규제 권한을 내려놓기가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왜 이처럼 정부에게 능력 이상의 역할을 기대하는 걸까요? 이에 관한 엄밀한 연구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종종 우리 사회에 여전히 ‘정부주도 개발시대’에 대한 향수가 남아 있기 때문은 아닐까, 합니다. 1960년대에서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권위주의 정부는 세세한 산업정책, 관치금융, 외환통제 등, 지금의 관점에서 볼 때 과도한 시장개입을 하면서도 빈곤의 악순환을 끊어내고 ‘한강의 기적’을 이룩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정치 민주화가 크게 진전된 1990년대 이후에는, 1980년대까지 9%를 넘나들던 성장률이 하락하기 시작하여 최근 2% 부근을 맴돌고 있으며, 급격한 인구구조 변화 등을 고려할 때 향후에도 성장률이 크게 반등할 가능성은 높지 않습니다. 이러한 경제의 역동성 저하에 대한 국민의 불만 내지 불안은, 과거 권위주의 정부의 강력한 리더십에 대한 아련한 향수를 자아낼 수 있는 요소일 것입니다. 권위주의적 정부의 통제로부터 개인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우리 스스로 정치 민주화를 이루어 냈다는 자긍심의 한구석에, 나의 불행이나 불안을 대신 책임져 줄 강력한 정부가 있기를 바라는, 조금은 모순된 기대가 여전히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부분입니다.
물론 경제역동성을 회복하기 위해 권위주의 시대의 개입주의로 회귀해야 한다고 믿는 분은 없으실 것입니다. 작금의 우리 경제는 경제개발 초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선진화되고 복잡해져서, 이제는 더 이상 정부가 경제의 세세한 부분까지 개입하여 더 좋은 결과를 만들 것으로 기대할 수 없습니다. 어떤 종류의 반도체를 생산해야 할지, 어떤 주식의 수익률이 더 높을지, 어떤 감성의 드라마가 더 많은 관객의 공감을 얻을지에 대한 판단을 해당 분야 전문가들보다 정부가 더 잘할 수 있는 시대는 이미 한참 지났습니다.
" 우리 스스로 정치 민주화를 이루어 냈다는 자긍심의 한구석에, 나의 불행이나 불안을 대신 책임져 줄 강력한 정부가 있기를 바라는,
조금은 모순된 기대가 여전히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부분입니다."
5. 권위주의 시대 경제정책에 대한 시각
이와 함께, 현시점에서 돌아볼 때 퍽이나 시장 개입적이었던 권위주의 정부 시대의 정책들도, 당시의 역사적·국제적 맥락을 고려하면 상당히 다른 평가가 가능하다는 점도 생각해 볼 대목입니다. 수천 년의 왕정시대와 수십 년의 식민시대를 이제 막 마감한 우리 사회에서, 이른바 ‘자유 시장경제 질서’가 원활히 작동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시장경제 질서의 기본인 사유재산권에 대한 인식과 제도도 확립되지 않았던 시기였으니까요. 그러나 당시 우리와 비슷한 처지에 있었던 저개발 신생 독립국들과 비교해 본다면, 우리의 소위 ‘정부주도 개발시대’는 오히려 민간의 역할을 점차 확대해 왔던 시기였던 것이 사실입니다. 북한을 포함한 대부분의 저개발 신생 독립국들이 정부 혹은 국영기업을 통해 무엇인가를 해 보려 했었던 데에 비해, 우리는 시장경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민간기업을 육성하면서 경제개발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책 방향이 수천 년간 잠자고 있던 개인의 경제하려는 의지와 민간의 창의를 끌어냄으로써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정치적 암흑기로 기억되고 있는 제5공화국도 경제 분야에서만큼은 자유 시장을 향해 큰 진전을 이룩한 시기였습니다. 1980년 제5공화국 출범과 함께 시행된 ‘경제 안정화 종합시책’의 키워드는 인플레이션의 하락을 의미하는 ‘안정’과 시장기능의 작동을 의미하는 ‘자율’이었습니다. 철저한 재정개혁을 통한 정부 효율화, 통화정책 독립을 통한 인플레이션 안정, 정책금융 축소와 금리자유화를 통한 금융시장의 ‘시장’ 기능 복원, 과감한 수입시장 개방을 통한 소비자의 선택권 확대 등이 모두 이 시기에 추진된 굵직굵직한 개혁들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20%를 넘나들던 인플레이션을 3% 내외로 안정시키면서도 연평균 10%의 성장을 달성하였고, 그 결과 남미의 선진국 베네수엘라·아르헨티나와 대한민국의 운명을 역전시키기 시작하였습니다. 어쩌다 부잣집 친구의 생일에 초대되어야 볼 수 있었던 바나나가, 전 국민의 대중적 과일이 된 것도 이 시기였습니다.
"우리의 소위 ‘정부주도 개발시대’는 오히려
민간의 역할을 점차 확대해 왔던 시기였던 것이 사실입니다. "
6. 경제자유화와 민주화, 그리고 포퓰리즘
이렇게 역사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우리나라는 지난 70~80년간 민간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을 점진적으로 확대해 왔으며, 그 결과 오늘의 자유 시장 선진경제의 기틀을 마련해 왔다고 생각됩니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경제 성과는 정부 개입의 산출물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민간의 영역을 확대해 온 결과물입니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렇게 이룩한 경제자유화가 1987년 정치민주화의 자양분이 되었다면 지나친 해석일까요? 사실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에는 중요한 공통 분모가 있습니다. 소수의 권력자가 아닌 다수의 의사를 존중한다는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익명의 유권자 선택에 기초하듯이, 시장경제는 익명의 소비자 선택에 기초합니다. 따라서 경제자유화의 진전이 정치민주화의 첨병이 되었다는 해석이 무리한 것만은 아닌 듯합니다.
그러나 두 제도에는 결정적인 차이도 존재합니다. 민주주의가 1인 1표 주의라면, 시장경제는 1원 1표 주의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두 제도의 괴리가 오늘날 우리 사회의 공공정책을 논함에 있어 가장 큰 갈등의 원인을 제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한 편에서는 다수가 원하는 정책을 채택하는 것이 민주주의 원칙에 부합한다는 주장을 펴는 반면, 다른 한 편에서는 그러한 정책들이 ‘포퓰리즘’으로 흐를 수 있음을 우려합니다. 즉, 다수가 원하는 공공정책이 그 다수의 이익을 항상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겠지요.
이러한 우려는 충분히 합리적입니다. 오늘날처럼 복잡다기한 사회에서, 개인 각자 각자 모두가 자기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는 있을지 몰라도, 모든 국민이 모든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약품은 판매해도 되고 어떤 약품은 판매하면 안 될지를 다수결로 결정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자문해 볼 수 있습니다. 경제정책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장에서의 수요와 공급, 가격 형성에 미치는 복잡한 파급경로를 모든 유권자가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그런 사회를 상상하기는 어렵습니다. 로베스피에르의 우윳값 인하 정책이 초기에는 다수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활한 페로니즘을 등에 업고 2003년부터 2015년까지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으며 추진된 연금 두 배 인상 등의 선심성 정책이, 결국 아르헨티나의 재정과 경제를 파탄으로 내몰았음도 주지의 사실입니다.
누군가가 나타나, 한국은행의 기준금리를 전 국민 온라인 투표로 결정하는 방안을 제안한다면 어떨까요? 극단의 정책 투명성이 확보될 뿐 아니라, 눈부시게 발전한 우리나라의 정보통신기술을 활용하면 기술적으로도 충분히 가능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방안을 제안한 그 누군가는, 이를 ‘통화정책의 민주적 통제’라는 미사여구로 포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수십 년에 걸친 경제학계의 연구는 통화정책이 대중의 압력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얼마나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는지 생생하게 입증해 왔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 일반 대중이나 정치권력에서 중앙은행을 독립시켜 관련 분야 전문가가 통화정책을 수행할 수 있도록 제도적 기틀을 마련하게 된 배경입니다.
제가 정치학에는 문외한입니다만, 애초에 삼권 분립을 설계한 Founding Fathers가 사법부만큼은 선거로 선출하는 대신 존경받는 법률전문가를 선임하도록 한 배경도, 다수의 정치적 압력을 매개로 한 포퓰리즘에 대한 우려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수결이라는 민주주의 원칙도 법의 테두리 안에서 기능해야 하며, 그러한 법의 지배를 인민 재판에 맡겨둘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성보다는 감성이, 사실보다는 인식이 더 크게 작용할 수 있는 대중 정치의 부작용을 줄이기 위함이었겠지요. 아무리 다수의 의사가 중요하다고 해도, 수학 문제의 정답을 다수결로 정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즉, 다수가 원하는 공공정책이 그 다수의 이익을
항상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겠지요."
7. 포퓰리즘으로부터 자유 시장경제의 보호
“경제정책은 경제 논리로”라는 슬로건은 1980년대 초에 경제학을 전공했던 제 귀에 따갑게 들려왔던 문구입니다. 당시에는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만, 돌이켜 생각해 보니 엄혹한 권위주의 시대의 정치적 압력에서 경제적 자유만큼은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선배 지식인들의 고육책이었던 것 같습니다. 4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이 문구는 그대로 유효해 보입니다. 다만 그 대상이 권위주의가 아니라 포퓰리즘으로 바뀐 것입니다.
자유 시장경제 체제를 포퓰리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는 전문가·지식인들의 역할이 확대되어야 합니다. 물론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할 필요도 있겠습니다만, 더 중요한 부분은 integrity를 갖춘 지식인과 전문가들이 적극적으로 여론 형성에 나서 주셔야 한다는 점입니다. 갈릴레이가 종교재판에서 지동설을 부정해도 지구의 자전은 멈추지 않지만, 경제·사회 정책을 논하는 전문가의 견해는 실제 정책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불과 70~80년 전까지만 해도 자유 시장경제라는 체제를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우리가, 온갖 역경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자유화를 진척시키면서 오늘날의 경제 성과를 일구어낸 점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자부심을 품을 만합니다. 그러나 과거의 성과가 미래를 담보하지는 못합니다. 포퓰리즘의 유혹으로부터 자유 시장경제 체제를 보호하여 지속적인 번영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 지금 우리 사회는 여러분들과 같은 지식인·전문가의 적극적인 역할을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제 말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긴 시간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여러분들과 같은 지식인·전문가의
적극적인 역할을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다는 점을..."
한국개발연구원의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3유형 : 출처표시 + 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저작권정책 참조
무단등록 및 수집 방지를 위해 아래 보안문자를 입력해 주세요.
담당자 정보를 확인해 주세요. 044-550-5454
소중한 의견 감사드립니다.
잠시 후 다시 시도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