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인년 호랑이 기운으로 다음 50년도 우리 경제를 잘 이끌어 달라.” 지난 1월 5일 이동걸 KDB산업은행 회장과 남창우 KDI 경영부원장이 여의도에서 만났다. 이 회장은 새해 덕담으로 대화의 포문을 열었고 남 부원장은 선험자의 고견을 청했다. 새로운 50년을 맞이한 KDI의 정체성과 지향점을 놓고 두 연구자이자 경영자는 쉴 새 없이 대화를 이어갔다.
꼭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기업구조조정을 연구하는 연구자로서 존경할 만한 분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KDIans』 ‘오! 공감 인터뷰’를 통해 뵐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먼저 KDI 구성원들에게 인사 말씀 부탁드립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KDI와 인연을 맺은 게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몸담은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많은 동료들과 함께 연구할 수 있어서 고향처럼 생각됩니다. 올해 임인년 호랑이 기운을 받아서 다음 50년도 우리 경제를 잘 이끌어주시길 그리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는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회장님 이력을 보니 정말 다양한 활동을 하셨습니다. KDI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셨습니까.
1998년 제가 청와대 행정관으로 근무하면서 아시아 외환위기를 겪었습니다. 당시 우리 모두가 경제붕괴 현상을 목도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나라 30대 재벌 중 16개가 도산했고 대한민국 모든 금융기관들이 다 무너졌죠. 그때 싱크탱크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했어요. 매달 KDI, 산업연구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한국환경연구원, 국토연구원 등 전 국책연구원들과 모여 회의를 했던 생각이 납니다. 이후 청와대 업무는 끝났지만 그 연속선상에서 구조조정 작업을 마무리해야 했고 그 브레인을 KDI가 맡으면서 저도 합류하게 됐습니다. 당시 나동민 박사와 팀을 짜 부실규모를 추정하는 작업을 했는데 그 결과가 대략 실제와 유사하게 나왔어요. 그때 제가 대우그룹 구조조정 방안을 작성하기도 했었습니다.
대한민국 위기 극복의 시간을 KDI에서 보내셨군요.
KDI가 구조조정의 브레인 컨트롤 타워로서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죠. KDI는 전통적으로 거시 부문이 강하다 보니 금융, 산업, 기업 현황들도 매크로 시각으로 보기에 제가 마이크로 시각에서 기업 현황, 재벌 현황, 부동산시장 현황을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를 놓고 동료들과 협업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전홍택 박사가 제 동기였습니다. 나름 성과가 있었고 어느 정도 계획한 대로 마무리가 됐다고 생각해서 한국금융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겼죠. 저는 워낙 매크로보다 마이크로가 재밌더라고요.
한국 경제에 있어서 KDI의 역할을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지난해 KDI가 개원 50주년을 맞았다고 들었습니다. KDI는 독보적인 우리나라 싱크탱크의 맏형으로서 혁혁한 활약을 했습니다. 이견의 여지가 없다고 봐요. 훌륭한 브레인이 모여 있는 만큼 앞으로도 대표 싱크탱크로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예전부터 마이크로에 취약하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마이크로 기반이 약하면 상황을 잘못 알게 되거나 심각성을 덜 느낄 수 있거든요. 매크로 기관이지만 지속적으로 마이크로에도 관심을 가져야 해요. 이론에 치우쳐 현장에서 멀어 지면 안 되겠죠. 이론과 현실은 괴리가 있을 수 있고 또 시장은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꾸준히 시장 사람들을 만나 정보를 얻고 접촉을 해야 합니다. 거리가 멀어지면 접촉이 줄고 그러면 마음이 멀어지고 생각이 멀어져요. 이 부분에 좀 더 신경을 쓰면 좋겠습니다.
KDB와 KDI는 이름에서부터 ‘Korea Development’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회장님께서는 자산 300조 원 규모의 국책은행 수장으로서 4년 넘게 계셨는데 기관을 운영하면서 가장 어려운 점은 무엇입니까.
우선, 산업을 많이 알아야 했습니다. 경제는 다 산업으로 구성돼 있어요. 금융은 산업과 다 연결돼 있고요. 여기 와서 조선, 건설, 해운 분야를 다 공부했습니다. 할 게 정말 많았지요. 산업별로 전문가들이 많아야 하는데 우리나라가 이 부분에 참 취약합니다. 그나마 저희는 기업금융 담당자들이 각 분야별로 열심히 해주니까 역할을 할 수 있는 거죠. 산업에 기반을 둔 기업금융, 본질적으로 이것이 참 쉽지 않습니다.
또 자율성이 굉장히 제한돼 있어요. 우리 사회에 불신이 만연하다 보니 이걸 관리하는 데 많은 에너지를 쓰고 있는 것이죠. 예를 들어 어떤 사안이 있으면 믿고 맡겨서 추진하고 종합적으로 판단해 문제가 있을 경우 제재해야 하는데 현재는 한 건 한 건을 규제하는 구조예요. 투명성과 책임성이라는 잣대를 놓고 정해진 프로세스를 조금만 벗어나면 제재하고 의심하고 비난하니 일하기가 정말 힘듭니다. 사실 구조조정이라는 것이 그 과정에서 부실을 털고 인수합병도 해야 하는데 이걸 어떻게 다 공개하면서 하겠습니까. 해외엔 수의매각이 일반적이죠. 그런데 우리나라는 모든 것을 다 공개하라고 해요. 그러면 일이 굉장히 경직되고 늦어질 수밖에 없어요. 정해진 프로세스를 벗어나면 딜이 깨지니 정부든 공공기관이든 ‘안 하는 게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괜히 움직였다가 철퇴만 맞는다는 인식이죠. 그런 불신을 걷어내고 종합적으로 판단하고 평가해야 합니다. 최근 저희가 대우건설을 매각했는데 그 과정에도 약간 잡음이 있었지 않습니까. 만약 그걸 산업은행이 맡았다면 딜이 깨졌을 거예요. 자회사인 KDB인베스트먼트가 자율성을 갖고 처리해서 성사된 것이지요. 우리 사회에 신뢰가 너무 붕괴돼 있는 것 아닌가 싶을 때가 많습니다.
또 자율성이 굉장히 제한돼 있어요. 우리 사회에 불신이 만연하다 보니 이걸 관리하는 데 많은 에너지를 쓰고 있는 것이죠. 예를 들어 어떤 사안이 있으면 믿고 맡겨서 추진하고 종합적으로 판단해 문제가 있을 경우 제재해야 하는데 현재는 한 건 한 건을 규제하는 구조예요. 투명성과 책임성이라는 잣대를 놓고 정해진 프로세스를 조금만 벗어나면 제재하고 의심하고 비난하니 일하기가 정말 힘듭니다. 사실 구조조정이라는 것이 그 과정에서 부실을 털고 인수합병도 해야 하는데 이걸 어떻게 다 공개하면서 하겠습니까. 해외엔 수의매각이 일반적이죠. 그런데 우리나라는 모든 것을 다 공개하라고 해요. 그러면 일이 굉장히 경직되고 늦어질 수밖에 없어요. 정해진 프로세스를 벗어나면 딜이 깨지니 정부든 공공기관이든 ‘안 하는 게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괜히 움직였다가 철퇴만 맞는다는 인식이죠. 그런 불신을 걷어내고 종합적으로 판단하고 평가해야 합니다. 최근 저희가 대우건설을 매각했는데 그 과정에도 약간 잡음이 있었지 않습니까. 만약 그걸 산업은행이 맡았다면 딜이 깨졌을 거예요. 자회사인 KDB인베스트먼트가 자율성을 갖고 처리해서 성사된 것이지요. 우리 사회에 신뢰가 너무 붕괴돼 있는 것 아닌가 싶을 때가 많습니다.
말씀하셨듯 산업은행의 주요 역할 중 하나가 기업구조조정인데요, 국책은행으로서 시중은행과는 입장이 다를 것 같습니다.
그렇죠. 저희는 국책금융기관의 역할과 은행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해야 합니다. 돈만 벌라고 하면 좀 쉬울 텐데(웃음) 국책금융기관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저희가 보유한 부실대출비율이 2.5%인데 시중은행은 보통 0.3%입니다. 리스크가 있는 곳을 더 지원하려다 보니 부실대출비율이 늘죠. 정부에서 자금을 대주고 정책만 하라고 하거나 정책은 신경 쓰지 말고 수익만 올리라고 하면 쉬울 텐데 저희가 벌어서 리스크를 감수하고 정책도 추진하려니 참 어렵습니다. 그런 특수성을 좀 이해하고 전체적으로 봐주면 좋겠는데 보통 한 쪽 입장에서만 보니 너무 어려워요.
사실 고백하자면 저도 2015년 기업구조조정 연구를 할 때 산업은행에 대해 부정적인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 한계 기업에 빠진 기업들을 분석해 보니 인적구조조정이라든가 자산매각의 경우 상대적으로 상업은행보다 정책금융기관들이 구조조정 진행을 덜 한다고 발표했고 그것이 여러 차례 회자되기도 했었어요. 말씀처럼 산업은행은 어느 정도 손실을 감내해야 하고, 그렇다고 또 기관 자체가 부실화되도록 놔두기도 어렵고 고민이 많으시겠습니다.
모질게 시중은행처럼 회수를 목적으로 할 수도 없고 기업을 살려서 가치를 올리는 것도 중요한데 늘어나는 부실을 그냥 둘 수도 없고 적정한 밸런스를 찾아야 합니다. 정 안 되면 닫아야죠. 청산이든 구조조정이든 과감하게 해야 하는데 정부도 부담스러운 결정은 일단 피하려고 합니다. 구조조정은 밀고 당기는 싸움이고 엄연한 현실이에요. 그 지점에서 또 하나 생각해 볼 것이 있어요. 예를 들어 부실이 생기면 정리를 하든지 자금을 투입하고 구조조정을 해서 재기하게 하든지 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선 손실이 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언론에서 손실이 났다고 난리법석입니다. 비용편익분석을 하는 것이지요. 시중은행이야 들인 돈과 받는 돈만 비교하면 되는데 우리는 우리가 들인 돈으로 우리가 수익을 얻을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이 얻을 수도 있습니다. 구조조정해서 시장에 나갈 때 성과가 더 크면 당장 우리가 손실을 입더라도 그렇게 하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그 수익을 산업은행으로만 한정하면 구조조정을 할 수가 없습니다. 비록 손실이 있더라도 기업이 시장에 나가 활동함으로써 얻는 이익이 경제적으로 크다면 그렇게 정리해 주는 것이 낫다, 이런 부분을 기자들한테 많이 설명했어요. 전향적으로 보도해야지 비판만 하면 안 된다고 부탁했었지요. 제가 처음 취임했을 때 대우건설 매각과정에 들어갔는데 막판에 협상이 결렬됐습니다. 3조 2천억 원이 지원됐고 1조 6천억 원에 매각협의됐던 사안이에요. 그걸 KDB인베스트먼트에 맡겨서 2조 1천억 원을 받아 지금은 성공한 건데, 당시 거의 거래가 성사된 줄 알고 언론이 그걸 평가하는데 계속 1조 6천억 원 손해 봤다고 보도하는 거예요. 정리가 다 돼서 시장에 나간다고 봐야 하는데 손실만 계속 언급하는 식이었지요. 그런 면을 설득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최근엔 산업은행이 모험자본에 대한 정책금융사업 넥스트라운드(투자유치), 넥스트라이즈(사업협력지원) 등을 적극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 배경이 무엇인지요.
제가 한 20여 년 전부터 기업 세대교체에 관심을 갖고 있었어요. 미국 주요 100대 기업 설립연도를 보니까 꾸준히 새로운 기업들이 진입하고 퇴출하면서 순환을 해요. 아마존, 구글, 에어비앤비, 넷플릭스 같은 곳이 다들 업력 15~20년 된 곳인데 우리나라는 50년 전 기업이 아직까지 경제를 끌고 가니 역동성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제가 예전엔 대기업들을 많이 비판했어요. 경쟁은 하지 않고 독점하고 시장의 혁신을 죽였기 때문이에요. 최근엔 혁신이 화두가 되고 전 세계적으로 기술혁명이 일어나면서 대기업도 열심히 변신하려고 하더군요. 이젠 사람만 세대교체될 것이 아니라 기업도 세대교체가 돼야 한다고 보고 산업은 행의 캐치프레이즈로 삼았습니다. 혁신산업, 혁신기업을 키우는 역할에 앞장서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제가 와보니 내부에서 ‘넥스트라운드’라고 벤처 투자유치사업을 1년 가까이 했더라고요. 거기에 엄청나게 많은 동력을 지원했습니다. 실 하나였는데 본부를 만들고 부행장급으로 부문장도 만들고. 저는 그저 직원들을 열심히 밀어준 것밖에 없어요. 취임 전 1년간 30건 정도 했다던데 제가 드라이브를 걸었더니 1주일에 세 번씩 40여 주를 해내더라고요. 그만큼 원하는 기업이 많고 벤처업계에서도 상승 작용을 일으켜 많은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3조 원 넘게 지원을 했고 그 중 한 20~30%는 저희도 실제 투자했고요. 또 스케일업 금융실을 만들어 투자한 곳을 관찰해서 후속투자도 추진하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구조조정기업 사람들은 만나면 저한테 욕하는데 스타트업 사람들은 만나면 굉장히 고마워해요. 산업은행에서 벤처가 제일 인기 있는 부서가 됐어요.(웃음)
구조조정기업과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겠군요. 우리 사회에 모험자본의 역할이 참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저희가 지원하는 모험자본이나 초기자본은 한계가 있습니다. 다만 저희가 들어가서 기업이 잘 되면 시중은행이 달려들겠죠. 저희가 그런 촉매제 역할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또 모험자본이 필요한 영역으로 남북경협을 꼽습니다. 리스크가 커서 초기엔 다들 꺼려할 거예요. 그걸 감수하고 저희가 들어가야죠. 먼저 가서 기반을 닦고 시장을 안정시켜서 우리 금융기관은 물론 해외금융도 끌어들여야 하는 글로벌 프로젝트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KDI가 새로운 50년을 맞이하는 첫해입니다. 긴 안목에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고견을 주시면 좋겠습니다.
KDI 연구자는 상아탑 속 학자와 달리 현실에 발을 디뎌야 합니다. 또 우리 사회의 변화를 좀 더 고민하면서 리드해야 합니다. 일례로 고령화사회로 간다면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진단만 할 게 아니라 이 문제를 어떻게 바꿔나갈지 사회적, 인간적인 관점에서 연구를 하면 어떨까 합니다. 시야를 넓게 보고 관심을 가지면 좋겠어요. 제가 금융연 원장을 할 때도 후배들이 안식년을 가면 “가서 제발 공부만 하지 말고 세상 좀 보고 와” 했습니다. 소설도 보고 드라마도 보고요. 저도 그게 많이 필요한데 잘하지 못했어요. 연구에 몰두하다 보면 사실 쉽지 않잖아요. 그러면 생각의 폭이 좁아질 수 있으니 부단히 넓힐 필요가 있습니다. 후배 박사들께 스스로 생각의 폭을 넓히는 시간을 가지시길 꼭 권합니다. 제가 최근에 직원들 앞에서 반성했던 일이 있어요. 저는 처음 인터넷전문은행이 나왔을 때 메신저 기반의 카카오뱅크만 살아남을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토스가 치고 나오더라고요. ‘아, 나 같으면 죽어도 못했을 일인데 시장을 알고 사회변화를 아니까 혁신사례가 나오는구나. 내가 정말 현실을 모르는구나’ 했어요. 열심히 연구도 해야 하지만 메타버스도 알고 밈(meme)도 알고 놀 줄도 알아야 해요. 그런 현실 기반 위에 제대로 된 연구와 정책제언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건 저 스스로에게도 과제입니다.
KDI는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토론을 많이 합니다. 말씀처럼 어떤 분은 연구에, 또 어떤 분은 현장에 기반한 정책제언에 무게를 둬야 한다고 끊임없이 논의하는 데 두 가지 모두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생각이 다시금 듭니다.
네, 싱크탱크는 둘 다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어렵고 재밌죠. 분명히 내부에서도 많은 고민과 토론이 있으실 줄 압니다. 우리 사회가 바뀌고 경제가 바뀌고 그에 따라 역할도 바뀌고요. 그런 면에서 드린 조언이자 제 과제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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