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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 - 연구원 밖 경제학 계획 도시에 산다는 것

2026 SUMMER VOL.69


. 거시·금융정책연구부 김선함 부연구위원
 
어느덧 만 2년째 세종에 살고 있다. 오송역과 BRT는 물론, 무수한 지하주차장, 무 자르듯 구분된 개발지역과 비개발지역의 경계도 이제는 익숙하다. 처음에는 볼 때마다 걱정스럽던 상가 공실도 이제는 무감각하다. 그러나 주말이면 텅 빈 듯한 도시의 풍경은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아, 매번 이곳이 행정중심도시로서 건설된 계획도시라는 사실을 상기한다지금까지 많은 계획도시를 거쳐왔다. 수도권 1기 신도시인 일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국내 최초의 계획도시로서 산업단지의 배후도시로 건설된 안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미국 유학 시절을 보낸 인디애나 웨스트라파옛은 그 자체가 계획도시는 아니지만, 연방정부에서 불하받은 토지에 설립된 퍼듀 대학교를 중심으로 한 소도시였다. 그리고 세종은 행정수도가 되기 위해 건설되었다. 이들의 성격은 다르지만, 도시가 주는 공통의 인상이 있다. 도시가 자연히 형성되었다기보다는, 어떤 목적이 있었고, 그 목적을 위해 도로와 건물이 배치되었다는 느낌이다세종에 살다 보면 그런 느낌은 더 선명해진다. 어떤 곳은 지나치게 반듯하고, 어떤 곳은 아직 비어 있다. 도시는 세워졌지만, 완전히 찼다는 느낌은 들지 않을 때가 있다. 처음 이곳에 온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해보았을 것이다. 국가는 정말 도시를 만들 수 있을까. 청사와 도로와 아파트는 지을 수 있다. 학교와 공원과 상가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도시가 되는가.
 
익히 알려진 대도시들 중 계획도시로 시작된 사례가 적지 않다. 미국의 행정수도 워싱턴 DC가 대표적이다. 미국은 독립 후 수도를 정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진통을 겪었다. 결과적으로 당대의 중심도시 뉴욕과 필라델피아 등을 수도로 삼는 대신 포토맥 강변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다. 프랑스 공학자 피에르 랑팡(Pierre L’Enfant)80만 인구를 목표로 계획했으나, 워싱턴 DC 인구는 출범 후 60년이 지난 1850년에도 4만 명 수준에 불과했다. 도로와 건물은 대도시의 형태를 갖추었으나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이즈음 방문한 영국의 대문호 찰스 디킨스가 도시에 의도만 가득할 뿐 실질은 없다라고 혹평하기도 했다(“City of Magnificent Intentions”). 워싱턴 DC가 지금과 같은 대도시권으로 성장하기까지는 산업화와 남북전쟁, 양차대전 등의 역사적 사건을 계기로 연방정부가 확대되는 등 다양한 외부 충격과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스페인의 수도이자 제1의 도시인 마드리드 또한 유사한 사례다. 엄밀한 의미의 계획도시는 아니지만, 정치적 결정이 도시의 운명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스페인의 역사적 중심지는 오랫동안 톨레도였고, 지중해에 면한 바르셀로나 역시 오랜 경제적 중심지로 기능했다. 마드리드는 이베리아 반도 중앙에 위치하긴 했으나 항구도 아니었고, 큰 강을 끼고 있지도 않았으며, 종교적 중심지도 아니었다. 16세기 펠리페 2세가 소도시이던 마드리드를 수도로 선포하고 궁정을 옮기며 오늘날 마드리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정치적 수도로만 기능하며 바르셀로나 등 여타 도시에 비해 인구규모와 경제력 모두 열세였다. 마드리드가 본격적으로 성장한 것은 300년 가까이 흐른 19세기다. 이베리아 곳곳이 철도로 연결되었고, 마드리드는 그 중심지로서 신산업을 다수 유치하며 성장했다. 이후 20세기 후반 들어 스페인 경제가 서비스업으로 전환될 때 바르셀로나를 제치고 스페인은 물론 남유럽을 대표하는 경제 도시가 된다. 지금은 유럽 최고 수준 프로축구 구단(레알 마드리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을 두 개나 보유한 거대도시지만, 이러한 위상으로 성장하기까지는 수백 년이 필요했다.
 
2012년에 출범한 세종은 이제 만 15년도 되지 않은 젊은 도시, 어린 도시다. 완전히 빈 땅에 조성된 것은 아니지만, 기존 충남 연기군은 1980년 이래 줄곧 인구가 10만 명을 밑돌던 소도시였다. 그러니 세종에 대한 평가는 다소 때 이르게 여겨진다. ‘사람이 적다’, ‘상권이 약하다’, ‘문화가 부족하다’, ‘밤이 조용하다’, ‘서울과 비교하면 부족하다등 이런 말들은 틀리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충분하지도 않다. 오래된 도시에는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다. 골목의 기억, 단골 가게, 학교를 중심으로 생기는 관계, 우연한 만남, 오래된 건물과 새 건물이 뒤섞이면서 생기는 풍경 같은 것들이다. 도시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세월의 무게는 물론,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힘까지 필요하다. 이러한 요소들은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도 만들거나 사기 어렵다계획도시의 어려움은 바로 여기에 있다. 국가는 도시의 하드웨어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도시의 소프트웨어까지 만들 수는 없다. 사람이 모이면 일자리가 생기고, 일자리가 생기면 더 많은 사람이 모인다. 도시의 성장은 결국 이런 순환이 만들어지는가에 달려 있다. 좋은 학교와 병원과 문화시설은 이 순환을 촉진한다. 반대로 충분한 일자리와 쾌적한 생활 환경이 생겨나지 않으면 도시는 업무단지 혹은 베드타운으로 국한되기 쉽다. 국토균형발전의 기치 하에 건설되었으나 일각에서는 죽은 도시라고까지 평가하는 브라질의 수도 브라질리아의 사례는 좋은 반면교사가 된다.
 
세종의 미래도 여기에 달려 있을 것이다. 세종은 행정도시로 출발했다. 워싱턴 DC보다는 브라질리아에 가까운 기획으로, 거대도시가 되지 않는 방향으로 설계되었다. 불편한 도로교통은 그 일환이었다. 주말이면, 밤이면 조용해지는 풍경도 설계의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낮에만 작동하는 도시는 없다. 세종이 진정한 의미의 도시가 되기 위해서는 민간기업, 문화시설 등 다른 요소들이 충분히 더해질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국가정책만이 능사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최초 설계에 따른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정책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많은 선진국에서 대도시 집중은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 사람과 기업과 고급 서비스가 대도시로 모이는 힘은 역사상 가장 강하다고 볼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런 흐름 속에서 국가가 새로운 공간 질서를 만들 수 있는지, 행정 기능 이전이 장기적으로 도시와 지역의 구조를 바꿀 수 있는지는 중요한 질문이다. 공공기관 이전을 통해 이에 대응하는 국가들도 하나둘 늘고 있다. 세종은 이 질문의 한복판에 놓인 도시다. 우리 사회가 저출산, 수도권 집중, 산업구조 변화라는 구조적 변화를 동시에 겪고 있으므로 세종 실험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도 있지만, 바로 그 변화를 기화 삼아 성장할 수도 있다. 따라서 나는 세종을 낙관하지도, 비관하지도 않는다. 계획도시는 늘 미완성처럼 보인다. 반듯하지만 허전하고, 새롭지만 낯설며, 가능성이 있지만 아직 증명되지 않았다. 그러나 미완성이 곧 실패를 뜻하지는 않는다. 워싱턴 D.C., 마드리드도 처음부터 대도시는 아니었다.
 
국가는 도시를 만들 수 있을까. 절반쯤은 그렇고, 절반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내 진부한 답이다. 국가는 도시가 시작될 조건을 만들 수 있다. 어디에 길을 놓을지, 어떤 기능을 옮길지, 어떤 주거환경을 만들지 결정할 수 있다. 그러나 도시를 완성하는 것은 사람들과 그들의 활동이다. 하여, 계획도시가 도시로서 태어나는 순간은 계획보다 늦게 찾아온다. 세종도 아직 태어나는 중이 아닐까.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계획도시 주민의 즐거움이자 괴로움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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