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호황기마다 되풀이된 '네덜란드 병(Dutch Disease)'
풍요 속 구조적 약점 보강할 골든 타임

기록이 거듭 경신되고 있다. 2026년 한국의 경상수지 흑자는 사상 최대인 2390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작년 1231억달러를 거의 2배로 끌어올린 주역은 반도체다. SK하이닉스의 작년 4분기 영업이익이 19조2000억원, 삼성전자 반도체부문의 같은 분기 영업이익도 16조원을 넘었다. 코스피(KOSPI)는 7800선을 돌파했고, SK하이닉스의 주가수익비율(PER)이 사상 처음으로 삼성전자를 추월했다. 뱅크오브아메리카는 2026년을 '1990년대 호황에 견줄 만한 슈퍼사이클'로 명명했다. 좋은 숫자만 늘어놓으면 위험을 잊기 쉽다. 그러나 모든 산업에는 사이클이 있다. 그리고 사이클의 정점에서 내려야 할 의사결정은 늘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어렵다.
지난 30년 동안 한국 반도체는 비슷한 정점을 네 차례 지나왔다. 1995년 첫 D램 호황, 2000년 닷컴 호황, 2017~2018년 메모리 호황, 그리고 2021년 단기 반등이다. 매번 같은 일이 반복됐다. 호황기에는 '이번에는 다르다'는 합의가 형성됐고, 침체기가 오면 '예상보다 깊다'는 한탄이 이어졌다. 정점에서 확보한 막대한 현금흐름은 설비 증설과 배당, 자사주 매입에 흡수됐고 침체기가 오자 그 설비가 다시 짐이 됐다. 호황이 위험한 이유는 사이클이 끝나서가 아니라 사이클이 끝날 것을 알면서도 그동안의 여유분을 구조적으로 쓰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패턴은 자원 의존 경제에서 자주 관찰되는 현상과 닮아 있다. 경제학이 '네덜란드 병(Dutch Disease)'이라 부르는 이 현상은 한 산업의 호황이 환율을 끌어올리고, 다른 산업의 경쟁력을 잠식하며, 노동과 자본을 호황 산업으로 빨아들이는 과정이다. 결과적으로 호황이 꺾일 때 다른 산업까지 함께 무너지는 '이중 추락'이 일어난다. 노르웨이는 이를 알고 1990년대 북해 유전 호황의 수익을 국부펀드에 가두어 본토 경제와 분리하고, 다음 세대를 위한 재원으로 묶었다. 반면 한국의 반도체 호황은 지난 30년간 그 시점의 거시지표를 떠받치는 데 늘 소진됐다.
지금 한국이 마주한 슈퍼사이클은 그 어느 때보다 길고, 그 어느 때보다 위험하다. 인공지능(AI) 인프라 수요가 단기간에 꺾이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길고, 동시에 호황기의 풍요가 산업·노동·재정 전반의 구조적 문제를 가리고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한국 경제에는 메우지 못한 약한 고리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생산성 격차, 정규직·비정규직으로 갈린 노동시장의 이중 구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절반 수준에 머무는 서비스업 생산성, AI 시대를 떠받칠 전력망과 인허가 시스템, 메모리에 편중된 비메모리·소부장 생태계가 그것이다. 슈퍼사이클이 이 약한 고리를 보강하는 데 쓰이지 않으면 사이클이 꺾이는 순간 한국 경제 전체가 함께 꺾인다.
최고경영자(CEO)에게도 같은 질문이 던져진다. 분기 최대 실적은 연구개발(R&D), 인력 양성, 공정 표준화, 데이터 인프라처럼 '회수기간이 긴 투자'로 흘러가고 있는가, 아니면 단기 주가 부양을 위한 자사주 매입과 배당으로 환원되고 있는가. 호황기의 영업이익이야말로 구조개혁의 가장 저렴한 재원이다. 산업정책의 관점에서 호황은 가장 어려운 결정을 가장 적은 비용으로 내릴 수 있는 짧은 창(window)이다. 그리고 그 창은 길지 않다. 메모리 가격 조정의 신호는 이미 시장 일각에서 감지되고 있고, 미·중 칩 경쟁의 변수와 신규 생산능력(Capa) 가동이 2027년 이후의 수급을 흔들 수 있다. 슈퍼사이클의 끝은 늘 갑자기 온다. 그러나 그 끝을 어떻게 맞이할지는 지금의 결정이 정한다. 사이클의 정점에서 '다음 사이클의 발판'을 놓은 기업과 국가만이 사이클이 꺾인 뒤에도 무너지지 않는다. 가장 좋은 때 가장 어려운 결정을 내릴 수 있는가.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한국에 던지는 진짜 질문이다.

김동영 KDI 전문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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